'거대한 아연관'에 갇힌 마을... 주민들의 '아픈 기억'
작성자 손영호

* 생명평화아시아의 연구기획위원인 김혜나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거대한 아연관'에 갇힌 마을... 주민들의 '아픈 기억'

[주장] 모든 것이 정상인 전쟁상태는 오늘도 계속된다

19.05.28 17:34l최종 업데이트 19.05.28 18:07l

 

 

"하늘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수백 개의 아연관들을 보았다. 아연관들은 햇빛을 받아 아름답고도 무섭게 빛났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잘 알려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또 다른 책 <아연 소년들>의 한 대목이다. 신화화된 전쟁의 민낯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작가를 재판정에 서게 만든 이 책은, 아프간 친소정권의 근대화 개혁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발로 촉발되어 9년간 최대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자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섬뜩하리만치 반짝이는 아연관들이 무정하게 기다리던 것은 바로 소련에서 아프간으로 파병된 소년들의 죽음이었다. 마치 그들이 흘렸을 뜨거운 피와 썩어가는 몸을 집어삼켜야만 그것의 차디찬 금속성이 영원토록 유지되기라도 하는 듯이.

사람들의 귓가에 좀처럼 가 닿진 않지만 아연관의 장송곡은 이곳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다. 인간과 자연을 먹어치워 고순도의 아연을 뱉어내는 '노다지'가 낙동강이 시작되는 물길을 가로막은 채 기염을 토한다. 우리에겐 영풍문고로 더 익숙한 기업, 영풍이 소유한 석포제련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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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광산에서 태백으로 보냈던 폐석과 폐미로 인해 침출수가 흘러나오는 모습
ⓒ 김혜나

 

버들치와 자라가 노닐던 경북 봉화군의 작고 소박한 마을은 세계 4위의 아연 공장이라는 버거운 과업을 떠안았다. 애초에 광산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을 것이다. 일본강점기 미쓰비시가 살을 도려내기 시작한 산을 내장까지 깊숙이 갉아먹었던 것은 영풍의 전신이 만든 광업소였다. 식민지적 근대화의 비극이 자발적 근대화의 희극으로 되풀이되는 순간이었다. 텅 빈 시신으로 돌아온 광부들과 그들을 꼭 닮은 껍데기만 남은 산은 생산량과 순이익의 증가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 보답은 봉화, 태백, 삼척의 산과 계곡들을 광산에서 나온 거대한 찌꺼기 더미로 묻어버리는 것이었다. 

이곳의 골짜기들에는 그 쓰라린 흔적과 아픈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2000년대 초 삼척의 한 골짜기에서는 아연을 뽑아낸 후 버린 폐석과 폐미가 태풍 루사와 매미에 휩쓸려 아랫마을을 덮치고 동해까지 흘러갔다. 산에 그려진 검은 자국들은 어마어마했던 양을 짐작게 한다. 또 다른 골짜기의 매립지 위에는 흙이 덮이고 이제는 나무마저 자라 사연을 모르는 이의 눈에는 여느 산과 다름없어 보인다. 감쪽같이 변신한 쓰레기 땅은 그곳이 본디 제 자리였다는 듯 시치미를 떼지만, 산에 새겨진 갱도의 구멍들은 미처 틀어막지 못한 검고 붉은 눈물로써 역사를 증언한다.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속 빈 산은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한국의 산업사회를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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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으로 폐석과 폐미가 떠내려간 후 드러난 구조물과 계곡의 모습(삼척)
ⓒ 김혜나

 

 

광석을 캐내는 나라에서 금속을 만드는 나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1970년대의 석포제련소였다. 광업소가 남긴 무거운 잔해들 위에 새로운 업보들이 더해졌다. 초기의 제련소에 기술을 전수한 일본기업 동방아연이 본토에서 이미 저질렀던 '이따이 이따이'의 악몽이 침묵 속에 생생한 현재로 재현되고 있다. 죽어가는 강산과 노동자들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거짓말들이 쌓여간다. 산업화 과정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석포들'과 '실향민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던 거짓말들이다. 기업-정부-병원-법원-학문의 카르텔은 거짓의 시스템을 물 샐 틈 없이 방어하고 재생산한다. 반복되는 거짓말은 바로 그 이유로 참말이 된다. 

영풍은 우리 모두의 고향을 지키려는 이들이 힘겹게 싸워 얻어낸 조업 정지와 환경개선 명령을 가볍게 짓밟고 지난 3월 말 석포면에 새로운 공장을 짓기 위한 산업단지 조성을 신청했다. 지난해 말부터 3개월간의 조사를 바탕으로 최근 환경부가 추가로 내린 조업 정지 4개월 처분에도 불복하려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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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220만톤의 폐석과 폐미로 계곡이 매장된 위에 흙이 덮이고 현재 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삼척)
ⓒ 김혜나

 

모든 것이 정상인 전쟁상태는 오늘도 계속된다. <아연 소년들>이 시리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의 이상함이 일상의 이상 없음과 너무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녹슬지 않는 아연은 전쟁 속의 죽음이라는 '예외적' 상황을 위해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부식과 부패를 거부하고 영생을 갈구하는 현대 사회의 구석구석을 지탱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포획하고 있다. 죽음을 부정하는 아연관 속에서 이미 죽어 있으므로 죽을 수도 없는 삶의 역설이 껍데기만 남은 채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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